제1장
1
정애(晶愛)는 <신여자(新女子)>란 잡지를 보다가 또다시 미닫이를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시름없이 오는 비는 오히려 아니 그치었다. 하늘을 회칠한 듯하던 구름이 히실히실 헤어져서 저리로 저리로 달아나건만는 그래도 푸른 얼굴은 보이지 아니하고, 머리올 같은 가랑비가 연기나 안개 모양으로 공중에 가물거리고 있었다.
오늘이 공일이라, 모처럼 동물원 구경을 가자고 동무들과 튼튼히 맞추어둔 것이 원수의 비로 말미암아 하릴없어 수포(水泡)에 돌아가고 말았다. 비가 오거든 펑펑 쏟아지거나 하였으면 단념이나 하련마는 시들지 않은 가는 빗발이 부슬부슬 뿌리기만 하기 때문에, 그는 조금만 있으면 개려니, 얼마 안되어 그치려니, 하는 일루(一縷)의 희망을 품고 미닫이가 닳도록 열어보고 또 열어보았음이었다.
정애의 얼굴에는 그늘이 지며, 혼잣말로 울 듯이,
(그저 비가 오네! 참 속상해 죽겠구먼!)
하고 미닫이를 홱 닫고는 다시금 아까 보던 잡지를 들추었다.
(이번에는 무엇을 볼꼬? 이것을 볼까? 그런데 이것이 몇 페이지나 되노?) 하고 손으로 책장을 날리며 (한 장 두 장 석 장…… 모다 석 장이구먼, 이것만 다 보고 나면 혈마 비가 그치겠지) 무릎 밑에 깔린 치맛자락을 빼내기도 하고, 눈을 가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올리기도 하며, 턱 괸 한 팔을 무릎 위에 얹고는 맥맥히 보기 시작하였다.
(벌써 끝일세. 인제는 비가 아니 올거야.)
기쁜 빛이 살짝 얼굴에 퍼지며, 또 손이 미닫이로 가려다 말고 걱정스럽게
(아직도 아니 그쳤으면 어쩌나?)
라고 입안말로 소곤거리었다.
누가 그에게, 여기서 예까지 보기만 하면 비가 아니오리라고 언약한 것도 아니요, 내기한 것도 아니언만 스스로 그렇게 결정하고, 스스로 그러려니 기대하며, 그 정(定)한 페이지를 읽고 날 적마다 인제는 비가 개었거니 하고 애를 쓰다가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른 것처럼 기뻐하면서 미닫이를 열었다가 그저 비가 오는 것을 보면 누가 그를 속인 것처럼 애닯고 슬펐었다. 이러구러 한 번 속고 두 번 속아 내려옴에, 점점 자기의 결정과 기대에 대한 믿음이 엷어가서, 인제는 미닫이를 열기 전부터 미리 근심조차 하게 되었다.
그의 귀에는 가만가만히 내려지는 빗소리가 그윽히 울리는 듯하였다.
(그래도 혈마 이때껏 올라구.)
그는 문틈으로 눈을 주며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비는 벌써 개지 않았을까? 구름조차 벗겨지지 않았을까? 화라(花羅)와 영숙(永淑)이가 나를 더리러 오지 않는가?…….고만 밖을 내다볼까? 아니 그럴 것이 아니다. 비가 오고 아니 오는 것을 통히 잊어버리고 있는 게 상책이다. 무망중에 화라와 영숙이가 쑥 달겨들면 얼마나 기쁠까?)
그는 이렇게 고쳐 생각하고, 또다시 잡지를 집어들다가 오늘 아침에 비오는 것이 하도 속이 상해서 갈아입으려던 옷도 아니 갈아입고 닦아두려던 구두도 아니 닦아 둔 것이 문득 마음에 걸리었다. 그리고 화라와 영숙이가 와서 남이 옷도 못 갈아입고 구두도 못 갈아 신게 재촉을 하면 어찌 할꼬 하였다. 입으려면 지금 입어야 되고 닦으려면 지금 닦아야 되리라. 날이 들고 아니 든 것을 시방 당장 알아두어야 되리라……
정애는 불현 듯 미닫이를 열어보았다. 비는 아니 온다. 회색 장막을 드리울 듯이 음침하던 공기 가운데 밝은 빛에, 해의 그림자조차 하야스름하게 드러나 있었다.
정애는 놀란 듯이 몸을 일으켰다. 기쁨으로 하여 춤추는 듯한 그의 발길은 선뜻 마루를 내려섰다. 마당 여기저기를 자근자근 밟아보았다. 땅은 그리 질지 아니하였다. 시방이라도 구경을 가려면 못갈 것이 아니다.
그는 부랴부랴 구두를 닦기 시작하였다. 구두를 닦기전에 화라와 영숙이가 올까 보아 조바심을 하면서 문소리가 날 적마다 연해 연방 돌아보았다. 그러나 구두를 다 닦을 때까지 동무들의 모습은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그는 닦은 구두를 신고서, 또한번 마당을 밟아본 뒤에 다시 한길을 시험해보려고 막 중문(中門)을 나서려 할즈음이었다.
"편지 받으오"라고 큰소리로 외치고 체전부가 편지 한 장을 떨어뜨리었다.
2
정애는 슬쩍 그 편지를 집어들어 겉봉을 보았다.
「시내 익선동 一九, 이은우(李殷雨)씨 방 이정애 씨 앞」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것 보아, 누가 나한테 편지를 하얐네.)
그는 저도 모를 사이에 이렇게 중얼거리고, 얼른 뒤쪽을 보았다.
「안국동 김영숙으로부터」
(이애가 웬 편지를 하였을꼬? 비가 그쳤는데 오지를 않고…… 아마도 저도 나 모양으로 오늘 아침, 비 오는 것이 속이 상해서 화풀이로 편지를 하였나 보다.) 마음 속으로 소곤거리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급히 겉봉을 떼어보았다.
정애씨! 용서하야 주시오.
그 편지의 첫머리는 이러하였다. 가는 웃음이 그의 입술에 흘렀다.
만나면 서로 네니 내니 하면서 편지에다가는 정애씨!라고 끌어올린 것이 우스웠음이다.
이런 편지를 드리는 것은 정애씨의 신성(神聖)을 더럽힘이요, 예절에 틀린 줄 모르는 바 아니외다. 몇 번이나 쓰다말고 부치려다 말았는지요! 그러나 인제는 참을 수 없습니다. 견딜 수 없습니다.
정애의 눈은 호동그래지고 말았다.
(이애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정애씨!
보시고 정애씨의 마음에 거슬리거든 뜯어버리시든지 살라버리시든지 뜻대로 하기는 하십시오! 그래도 읽기는 다 읽어주셔야 합니다. 보기는 다 보아주셔야 합니다.
정애씨!
무엇으로 나의 가슴을 형용하며 무엇으로 나의 마음을 비유할는지요! 천 갈래로 흩어진 머리카락 같다 할까, 만 가닥으로 엉클어진 실끝 같다 할까? 이 불완전한 우리 인간의 발명한 글로와 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도 없고, 비유할 수도 없습니다.
정애는 그린 듯한 눈썹을 보일 듯 말 듯 찡그리며, (이애가 왜 구슬픈 소리만 하나?……. 그애 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하고 다시 그 밑을 보았다.
정애씨!
나는 외롭습니다. 나는 쓸쓸합니다. 바다는 바다를 이었는데 외로이 떠나가는 편주(扁舟)와 같습니다. 사막에서 사막으로 쓸쓸히 걸어가는 행려(行旅)와 같습니다.
정애씨!
나를 외로운 데서 건져주소서, 쓸쓸한 데서 구해주소서!
세상도 넓고 사람도 많지마는 정애씨만 아니면 나는 영원히 외롭고 쓸쓸할 것이외다.
정애씨의 사랑이라야 가을바람이 소슬(蕭?)한, 싸늘한 이 가슴에도 따스한 봄 입김이 들 것이외다. 줄여 말하면, 나는 정애씨를 사랑하노니, …… 열렬히 사랑하노니 정애씨도 나를 사랑하야 달란 말이외다. 그러나 나는 전적으로 정애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외다. 정애씨와 같이 그림자처럼 서로 따르고 거울처럼 마조앉기를 바라야 바랄 수 없는 사람이외다.
봄날 따뜻한 꽃 그림자 밑에 자리를 쓸어안고 가을바람 선선한 달빛 아래 옷깃을 날리면서 꿀 같은 장래의 낙원을 그림은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복된 일일까요?
그러나 그보담도 내 마음은 정애씨의 마음에 있고 정애씨의 마음도 내 마음을 떠나지 아니하야 기쁨도 노누고 슬픔도 노눈다고 하면 그뿐일 것이외다.
멀리멀리 서로 떠나 있어, 산 막히고 문 가린 저 편에 있는 정애씨를 생각하고 애닮은 눈물을 흘리다가도 「정애도 지금 너를 생각하고 있나니라」하는 정애씨의 마음소리를 들을 것 같으면 나는 눈물이 걷히기 전에 기쁜 웃음을 웃을 것이외다.
정애는 단숨에 예까지 보고 나서 두 손이 힘없이 그 편지를 무릎 위에 놓으며 한참 황황(恍惶)하였다.
꽃 그림자 밑에 앉은 자기의 모양, 달 아래 선 자기의 모양이 선하게 나타나다가, 서로 외로이 서서 저편 사람을 생각하고 눈물을 짓는 광경이 보이며, 그 거슴츠레한 눈에 스르르 눈물이 괴기 시작하였다.
마침 이때였다. 홱 하고 밑창이 열리며 정애의 동무 화라가 들어온다.
3
살이 삐죽삐죽 내다보일이만큼 팽팽히 양말(洋襪)을 잡아당긴 종아리가 가볍게 문지방을 넘어선다. 솜씨있게 화장한 얼굴엔 흔적 없는 분길이 보얗게 퍼졌고, 삼분의 일로 멋부려 가른 머리엔 윤이 지르르 흐르면서도 힘없이 풀린 두어 올이 뺨 위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정애는 놀란 듯이 몸을 흠칫하며 두 손으로 얼른 그 편지를 움켜쥐었다.
"들어앉아서는 무엇을 하니? 동물원 구경을 아니 갈 터이냐? 땅이 아주 말렀더라."
화라는 앉지도 아니하고 서서, 이런 말을 하다가 정애가 한 발이 넘을 듯한 편지를 움켜쥐고 있는 양을 보고,
"그것은 무엇이냐? 누구한테서 온 편지길래 그야말로 만지장서이냐?"
정애는 고개를 숙이며 몹시 말하기 어려운 듯이
"아니 저어……"
어물어물하고는 귀밑까지 새빨갛게 당홍물이 들고 말았다. 처음에는 영숙이한테서 온 것인 줄 알고 읽었다가 그 사연에 스스로 흥분되어 눈물까지 흘릴 뻔하였으나 다만 그 말이 이상하다 할 뿐이요, 그 경우가 가엾다 할 뿐이요, 영숙 아닌 다른 사람의 편지인 줄은 짐잠하지 못하였다. 짐작하지 못하였다느니보다 의심할 어느 겨를이 없었다. 함이 적당할지 모르리라.
그러나, 이제 와서는 직각적(直覺的)으로 영숙의 편지가 아닌 줄도 알았고 또 자기와 같은 여성의 편지가 아니라 어떤 남성의 편지인 줄도 어렴풋이 깨닫기도 하였다.
화라는 몸을 구부려 「너의 하는 양이 괴이쩍구나」하는 듯이 정애의 얼굴을 뚫어지라고 들여다보았다.
불이 붙은 듯한 두 뺨에는 후끈후끈 단김이 나는 듯하고 내리감은 긴 속눈썹엔 젖은 듯 한 듯한 눈물 빛이 은가루같이 번쩍이고 있다.
정애는 화라의 시선을 피하려고 애를 쓰며,
"이 애가 왜 남의 얼굴을 이렇게 들여다보아!"
라고 안타까운 소리를 떨었다.
화라는 의심을 더럭 내었다.
"울기는 왜 울었니? 대관절 무슨 편지길래 그렇게 숨기려 드느냐?"
이럴 즈음에 그는 정애의 곁에 놓인 편지를 손싸게 집어들었다.
"나는 누가 한 편지라고, 영숙의 편지로구나…… 그 속에 무슨 말이 있건대 나를 아니 보이려 든단 말이냐? 내가 알면 아니될 비밀이 무에냐?"
"비밀이 무슨 비밀이냐, 아모 말도 없어……"
"아모 말도 없으면 왜 아니 보이려고 한담!"
정애는 덤덤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
"나를 따돌리고 너희들 둘이만 소곤소곤하던 게 인제 아니 무슨 까닭이 있었구나."
하고 화라는 그 눈초리가 길게 찢어진 실눈을 샐쑥하게 깔아메치었다.
"내가 언제 너를 따돌리고 영숙이와 소곤거리던? 남의 애매한 말도 퍽도 한다"
정애는 말이 딴 길로 나간 것을 마음 그윽히 기뻐하면서 매우 분한 듯이 채쳐 물었다.
"왜 저어 그날-- 영숙의 집에 놀러 갔던 날, 너희 둘이만 무엇 사러 나가지 아니하얐니?"
"원참, 그때 자꾸 같이 가지니깐 저 혼자 책을 보고 있겠다 하구서!"
"그 말은 그만하고 편지나 좀 보여주렴!"
하다가 겉봉의 글씨를 자세히 보더니
"이것은 영숙의 글씨가 아니야! 그애가 웬걸 이렇게 쓸 줄 아나. 이것은 여필이 아니고 남필이야!"
라고 무슨 큰발견이나 한 듯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한동안 그는 골똘히 무엇을 생각하는 것처럼 멍멍히서 있었다. 그 찰나에 그의 얼굴은 오리알빛같이 해쓱해지고 말았다. 그럴 동시에 정애를 노려보는 시선은 칼날같이 날카로왔다.
"흥, 그래서 아니 보여주랴고 했구나. 그래도 기어기 좀 보고는 말걸!"
하고는 자기를, 또는 남을 빈정대듯이 쓸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속엔 허전허전하는 절망의 울림과 가슴을 짜내는 애닯은 웃음가락이 품기어 있었다.
정애의 곁으로 바싹 다가들며 우격으로 그 편지를 빼앗으려 하였다.
4
화라가 달려드는 양을 보고 정애의 눈에는 마치 첫날밤에 신랑의 달겨듬을 바라보고 신부의 그것 모양으로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섞이어 돌고 있었다.
"남의 편지를 왜 자꾸 보자니?"
정애는 뒤로 쏠리며 들어오는 화라의 손을 밀치었다.
"안 보이겠다는 것을 빼앗기까지 하렬 것은 무에야!"
그 목소리는 벌써 울음을 띠고 있었다.
그래도 화라의 한 손은 힘있게 그 편지 한 머리를 잡았다. 정애는 한 손으로 그 편지를 단단히 움켜쥐고 또 한 손으로는 편지 잡은 화라의 손을 밀어내려 들었다.
바람에 취둘리는 백합화 모양으로 네 송이 보오얀 손은 이리 번뜻, 저리 번뜻 서로 부딪쳤다 서로 떨어졌다 하였다. 그럴 사이에 화라의 한 손이 영악스럽게 그 말썽부리는 종이쪽을 훔쳐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이 정애의 편지 잡은 손을 비틀어돌리기 시작하였다. 엉긴 우유처럼 보얗던 살에 연지빛이 스미며 가늘게 떨고 있다.
"아이구 아퍼! 이 애가 왜 이래!"
정애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그러기에 편지를 좀 놓으란 말이야."
화라는 숨찬 소리로 부르짖었다.
두 처녀는 피차에 숨소리를 씨근벌떡거리고 있었다. 다 같이 상기된 새빨간 뺨들엔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올올이 검은 선을 그리고 있었다. 마주 닿은 두 대가리는 몸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흔들 춤추듯 하였다.
처음부터 승패는 기정적(旣定的) 사실이었다. 화라는 열아홉 살로 정애보다 이태 맏이었고 또 힘도 세었다.
화라에게 잡힌 정애의 손목은 붉다 못하여 자주빛을 띠어오더니, 마침내 그 손아귀가 맥없이 풀어지고 말았다. 어느 곁에 화라는 그 편지지를 빼앗아들었다.
그 약탈물은 배배 꼬이어 짓비벼 놓은 듯하였다. 화라는 버럭 몸을 일으켜 저리로 가며 개가(凱歌) 대신 씩 웃었다.
"나 좀 보고 주께."
하고는 구긴 것을 살살 펴가며 읽어보려 하였다.
실랑이에 더할 수 없이 지친 정애는 그만 그 자리에 늘어질 것 같았으나 화라의 편지를 펴보려는 꼴을 볼 제 없던 기운이 온몸에 넘치는 듯하였다. 그는 나의 보배를 남에게 빼앗긴 것처럼 분하고 아깝고 애닯아 견딜 수가 없었음이다.
나는 듯이 몸을 소스라칠 겨를도 없이 화라를 뒤로 안으며 잃은 물건을 도로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늦었다.
화라는 정애의 일어남을 보고 벌써 어느 곁에 그 약탈물을 몸속 깊이 감추고 있었다.
"그렇게 쉬웁게--------"
하고 화라는 돌아서서 정애를 떠다밀며 어림도 없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이리 주어! 왜!"
정애의 눈에는 핏발이 돌았다.
"주기는 무엇을 주어! 보지도 않고 준단 말이야!"
하고 한 마디 던지고는 빼쳐 밑창을 열고 달아나려 하였다. 정애는 간신히 도주자(逃走者)의 치마 뒤폭을 쓸어잡았다.
"이건 왜 이래! 놓아요, 치마 터지겠다!"
도망꾼이 고개를 돌이켜서 이런 말을 하며 추격자에게 붙들린 치맛자락의 어금을 잡아 휙 뿌리치었다. 손에 잡힌 것이 슬쩍 빠져나가자 정애는 허탕을 치고 기운 없이 쓰러져버렸다.
화라는 나는 몰라, 하는 듯이 밑창을 확 닫치고 번개같이 마루를 내려선 그는 구두 신기가 바쁘게 끈도 맨체만체 무슨 사나운 짐승한테나 쫓겨가는 사람 모양으로 촉급(促急)한 발길을 문간을 향하고 옮기었다.
한편으로, 정애는 밑창이 탁 닫히매 그 엷은 종이와 가는 칸살로 된 것이언만, 그에게는 강철이나 반석(盤石)으로 만든 성문(城門) 모양으로 제 힘 가지고는 열어도 볼 수 없고 밀어도 볼 수 없는 것 같았다. 어느 때까지 멍멍하게 쓰러진 그대로 있을 뿐이었다.
……문득 가슴이 찌르르해 오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무엇인지 슬픈 듯하였다. 무엇인지 원통한 듯하였다. 무엇인지 궁금한 듯하였다. 흰 물이 돌고 또 도는 그의 눈에는 아까 본 그 편지의 첫머리가 너붓너붓하게 보이는 듯하였다.
5
그 이튿날 학교에서 정애는 화라를 보았다. 보기는 보았으되 그 편지 말을 묻지도 아니하였다. 자기가 묻기는새려 화라가 그 편지 말을 끄집어낼까 보아 그의 곁에도 아니 가고 비슬비슬 피하였다.
정애에게 대한 화라의 태도도 일변하였다. 정애를 보기만 하면 손목도 쥐고 어깨도 누르며 할 말 못할 말 아니하는 것이 없던 그가 오늘은 웬일인지 정애를 힐끗 한번 보고는 고개를 다소곳하고 인사도 아니하였다. 그의 태도는 평일과 아주 딴판이었다. 하학 시간이면 온 학교 안을 울리던 그의 쾌활한 웃음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상학중이든 하학중이든 넋 잃은 사람 모양으로 우두커니 책상머리에 눌러앉아 있었다. 가다듬지 않은 머리카락은 어푸수수하게 이마에 흐늘거리고 언제든지 봄빛이 무르녹은 듯하던 두 뺨은 새하얗게 혈색이 없었다. 두 관자놀이에는 파릇파릇하게 힘줄이 뛰놀고 있었다.
"이애, 오늘은 웬일이냐! 아주 어른이 다 되어버렸으니……"
하고 동무 하나가 그의 어깨를 누르며 웃을 적에 화라는 괴로운 듯한 얼굴로,
"이애가 왜 이래. 남 귀찮아 죽겠는데."
하고 그 손을 밀어내리었다.
"여보 하이칼라 씨, 오늘은 왜 화장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동무 하나가 웃는다.
"유난스럽게 화장을 잘하더니 구라브 백분(白粉)이 동이 난 게지."
다른 동무 하나가 곁에서 말보탬을 하였다.
"아모리 한들 동이야 날라구, 좀 잠이 과하셨든 게지."
또 동무 하나가 조롱을 하였다.
"듣기 싫다! 저리들 가주어. 골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견딜 수가 없다."
하고 화라는 소태나 먹은 듯이 온 상판을 찡그려 부쳤다.
"그러길래 내가 공부를 너무 맙시사고 한두 번 일르지 않았지요."
또 다른 동무가 이렇게 말을 뒤받고 스스로 재치있는 제 말을 기뻐하는 듯이 땍때글 웃었다. 여러 동무도 한번에 웃었다.
"왜들 까짜를 올려!"
화라는 참지 못하여 성을 버럭 내었다.
"성냈다 빗냈다 호박국 끓여라, 하하하……"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화라는 세숫물을 떠오라 하였다. 팔뚝을 부르걷고 옷깃을 뒤로 훨씬 젖히고 저고리 고름을 허붓이 풀어 안가슴까지 드러내고는 세수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분으로 씻고 그 다음에는 비누로 씻고 또 그다음에는 분으로 씻었다.
한 시간도 넘도록 늘어지게 물로 얼굴을 대패질하고 방에 돌아온 그는 일본제 경대(鏡臺)의 큼직한 거울 앞에 앉았다. 거울에 비춰가며 희기 백설과 같고 길이 두 발을 넘을 듯한 양수건(洋手巾)을 휘몰아 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요모조모를 맵자하게 닦기를 말지 않았다.
늠실늠실 떠나가는 흰구름 사이에 드러났다 숨었다 하는 달 모양으로 그의 얼굴도 거울 하늘에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두어 군데 발긋발긋이 솟은 여드름을 애써 짜내고는 화장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앞에 옹긋쫑긋이 늘어놓인 긴 병 짧은 병 푸른 갑(匣) 흰 갑이 차례차례로 들먹거려지며 한동안 열 손가락이 북같이 얼굴 위로 쏘대었다. 머리를 옆으로 비스듬히 가르고는 일부러 몇 올의 머리칼을 풀리게 하여 귀밑에 남실거리게 하였다. 이러기에 넉넉히 두 시간은 걸렸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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